환경 연구진의 모임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 환경 관련 커뮤니티 “기후PD” 등 환경과 사회공헌, 공정경영을 얘기하는 전문가들이 좀 긴 호흡을 가지고 정리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ESG의 다양한 의미와 배경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이미지 출처: https://new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27280
21C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다 어떤 형태로든 우울증과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성 질환들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우리는 오랫동안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니까. 사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기계와 함께 때로는 기계를 닮아가며 효율과 생산성을 기준으로 존재의 가치를 판단 받아 왔다. 노동은 생존의 조건이자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피로사회』로 우리에게 알려진 한병철 교수는 기존의 규율 사회에서 통제당하는 복종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이제 성과사회에 최적화된 성과 주체로 변했다고 말한다. 성과를 내야 하는 새로운 주체는 스스로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기할 것은 성과사회에서는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저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서 자신을 스스로 착취한다. 이것이 ‘자기 착취’다. 자발적으로 본인을 착취하기 때문에 본인이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누구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니 매우 주체적인 인간처럼 보이나 실은 자유로운 척할 뿐이다. 나는 이 ‘자기 착취’라는 단어가 주는 처연함에서 공허한 가상세계의 공간을 끊임없이 유영하는 소진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일은 정말 우리 삶의 본질일까? 라고.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사실, 그동안 많은 사상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과잉노동과 그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에 대해 진단하고 꾸준히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왔다. 버트런트 러셀은 그러니까 70여 년 전에 이미 하루 4시간씩만 일하자고 제안했다. 러셀은 말한다. 근면은 역사 이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해온 덕목이며, 부지런해야 한다는 강박은 노예근성을 의미하는 거라고. 그 오래 전, 사회에 대한 이 날카로운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우리 현대사회의 핵심과도 고스란히 연결되기 때문일 게다. 일에만 매몰되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놓지 말라'는 조언을 건네는 것만 같다. 이 맥락에서 그가 보기에 여가(The Leisure)는 문명의 필수적 요소였다. 근로의무를 부과하는 자본가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이 진정 가치 있고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해 우리가 여가를 즐기며 좀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그 ‘여가’라는 개념이 다시 소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인간의 일을 AI가 대신해주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는 공장에서부터 병원, 법률 사무소, 심지어 예술 창작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겨졌던 수많은 일들이 점점 AI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하지만 절대 쉬지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의 ‘쓸모’는 조금씩 자리를 잃어간다.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이미 수십 년 전, 이런 미래를 예견했다. 그는 단순히 일자리가 사라지는 문제를 넘어서, 노동이 중심이던 사회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될 것이라 했다. 그가 말한 ‘노동의 종말’은 비극이 아니라, 전환의 신호로 읽힌다. 인간은 더 이상 효용성으로만 존재 가치를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쓸모를 잃은 뒤에도 존엄할 수 있는가?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킨다면, 그 해방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답은 비시장적 영역에서의 ‘삶’이 될 테다. 타인을 돌보고, 공동체를 만들고, 창조하고, 사유하고, 느끼는 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비효율적인 것들’에 우리가 다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AI가 아닌 인간만의 고유한 미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노동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을 다시 상상해야 한다. ‘쓸모없음’이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 새로운 가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은 어쩌면 인간 가능성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의 종말』의 예언처럼, 우리는 점차 인간의 노동이 줄어드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효율성과 생산성 중심의 사회 너머 인간의 취향과 감성, 관계 중심의 사회와 노동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사탄은 늘 게으른 손이 저지를 해악을 찾아낸다’는 말을 듣고 자라면서 열심히 일만하게 되는 양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는 이제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시간을 절반으로 줄여도 되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했다. 근로가 미덕인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러셀에게 있어 ‘게으름’이란 생산적인 여가활동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노동 이외에도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생산적인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다. 사실 우리 현대인은 늘 게으름에 대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단다.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도, 권리로 누리고픈 의지도 없었을 뿐이다.
AI가 우리의 일을 대신 해주는 시대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산만함 그 자체인 현대사회에서는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없었다. 그저 분주할 뿐인 현대인들은 귀 기울여 듣는 재능도 사라지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공동체는 와해되고 타자와의 연대도 불가능하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 금세 사라지는 것들이야말로 깊은 사색을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는 비밀’이다. 지금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활동적 삶’에서 더 나아가 깊은 심심함으로 이끄는 ‘사색적 삶’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대의 인간은 돈 몇 푼 보다는 고귀한 정신에 열정을 쏟았더랬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겼고,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전차 경주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또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마상 시합을 벌였고. 이렇게 그 시대 사람들은 놀이라는 경쟁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디아고게’를 완성했다. 지친 노동으로 늘 번아웃 되기 일쑤인 현대적 인간과 대조되지 않은가. 그들의 이 비생산적인 놀이 예술이 노예들의 노동에 빚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AI가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 더 많이 놀고, 배우며, 자기 취향을 중심으로 삶을 다채롭게 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마련되고 있지 않은가. 이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이 바로 현대판 '디아고게'다. 즉 ‘놀이를 통해 자기 삶을 사유하고 공동체와 교류하며 문화를 형성하는 고차원적 행위’말이다. 21세기 베짱이의 당당한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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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경 ESG지속가능연구소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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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연구진의 모임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 환경 관련 커뮤니티 “기후PD” 등 환경과 사회공헌, 공정경영을 얘기하는 전문가들이 좀 긴 호흡을 가지고 정리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ESG의 다양한 의미와 배경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이미지 출처: https://new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27280
21C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다 어떤 형태로든 우울증과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성 질환들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우리는 오랫동안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니까. 사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기계와 함께 때로는 기계를 닮아가며 효율과 생산성을 기준으로 존재의 가치를 판단 받아 왔다. 노동은 생존의 조건이자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피로사회』로 우리에게 알려진 한병철 교수는 기존의 규율 사회에서 통제당하는 복종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이제 성과사회에 최적화된 성과 주체로 변했다고 말한다. 성과를 내야 하는 새로운 주체는 스스로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기할 것은 성과사회에서는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저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서 자신을 스스로 착취한다. 이것이 ‘자기 착취’다. 자발적으로 본인을 착취하기 때문에 본인이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누구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니 매우 주체적인 인간처럼 보이나 실은 자유로운 척할 뿐이다. 나는 이 ‘자기 착취’라는 단어가 주는 처연함에서 공허한 가상세계의 공간을 끊임없이 유영하는 소진된 인간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일은 정말 우리 삶의 본질일까? 라고.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사실, 그동안 많은 사상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과잉노동과 그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에 대해 진단하고 꾸준히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왔다. 버트런트 러셀은 그러니까 70여 년 전에 이미 하루 4시간씩만 일하자고 제안했다. 러셀은 말한다. 근면은 역사 이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해온 덕목이며, 부지런해야 한다는 강박은 노예근성을 의미하는 거라고. 그 오래 전, 사회에 대한 이 날카로운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우리 현대사회의 핵심과도 고스란히 연결되기 때문일 게다. 일에만 매몰되어 내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놓지 말라'는 조언을 건네는 것만 같다. 이 맥락에서 그가 보기에 여가(The Leisure)는 문명의 필수적 요소였다. 근로의무를 부과하는 자본가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이 진정 가치 있고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해 우리가 여가를 즐기며 좀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그 ‘여가’라는 개념이 다시 소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인간의 일을 AI가 대신해주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는 공장에서부터 병원, 법률 사무소, 심지어 예술 창작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겨졌던 수많은 일들이 점점 AI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하지만 절대 쉬지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의 ‘쓸모’는 조금씩 자리를 잃어간다.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이미 수십 년 전, 이런 미래를 예견했다. 그는 단순히 일자리가 사라지는 문제를 넘어서, 노동이 중심이던 사회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될 것이라 했다. 그가 말한 ‘노동의 종말’은 비극이 아니라, 전환의 신호로 읽힌다. 인간은 더 이상 효용성으로만 존재 가치를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쓸모를 잃은 뒤에도 존엄할 수 있는가?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킨다면, 그 해방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답은 비시장적 영역에서의 ‘삶’이 될 테다. 타인을 돌보고, 공동체를 만들고, 창조하고, 사유하고, 느끼는 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비효율적인 것들’에 우리가 다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AI가 아닌 인간만의 고유한 미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노동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을 다시 상상해야 한다. ‘쓸모없음’이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 새로운 가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은 어쩌면 인간 가능성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의 종말』의 예언처럼, 우리는 점차 인간의 노동이 줄어드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효율성과 생산성 중심의 사회 너머 인간의 취향과 감성, 관계 중심의 사회와 노동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사탄은 늘 게으른 손이 저지를 해악을 찾아낸다’는 말을 듣고 자라면서 열심히 일만하게 되는 양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는 이제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시간을 절반으로 줄여도 되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했다. 근로가 미덕인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러셀에게 있어 ‘게으름’이란 생산적인 여가활동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노동 이외에도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생산적인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다. 사실 우리 현대인은 늘 게으름에 대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단다.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도, 권리로 누리고픈 의지도 없었을 뿐이다.
AI가 우리의 일을 대신 해주는 시대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산만함 그 자체인 현대사회에서는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없었다. 그저 분주할 뿐인 현대인들은 귀 기울여 듣는 재능도 사라지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공동체는 와해되고 타자와의 연대도 불가능하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 금세 사라지는 것들이야말로 깊은 사색을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는 비밀’이다. 지금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활동적 삶’에서 더 나아가 깊은 심심함으로 이끄는 ‘사색적 삶’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대의 인간은 돈 몇 푼 보다는 고귀한 정신에 열정을 쏟았더랬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겼고,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전차 경주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또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마상 시합을 벌였고. 이렇게 그 시대 사람들은 놀이라는 경쟁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디아고게’를 완성했다. 지친 노동으로 늘 번아웃 되기 일쑤인 현대적 인간과 대조되지 않은가. 그들의 이 비생산적인 놀이 예술이 노예들의 노동에 빚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AI가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 더 많이 놀고, 배우며, 자기 취향을 중심으로 삶을 다채롭게 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마련되고 있지 않은가. 이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이 바로 현대판 '디아고게'다. 즉 ‘놀이를 통해 자기 삶을 사유하고 공동체와 교류하며 문화를 형성하는 고차원적 행위’말이다. 21세기 베짱이의 당당한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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